들었던 촛불을

안숙선
앨범 : 춘향가

방으로 들어가 좌정 (坐定)한 후 향단이 절을 하며
"소녀 향단이 문안 (問安)이요"
"워따 향단아 이제 너의 아씨는 살었다
건넌 방에 가서 점화 (点火)허고
고두쇠 불러 관청에 가 고기 사 오라고 그러고
너는 어서 닭 잡어 찬수 (餐需) 장만허여 진지 지어라
그러고 우선 그 촛불이 급하니 촛불 좀 가져 오너라"
"장모 촛불은 뭐허러 이리 급히 야단인가?"
"아이고 우리 사위 얼굴 좀 봐야 겄는디
눈이침침해서 통 보여야제"
"아 이 사람아 내일 밝은 날 봐도 실컷 볼 텐데
무엇이 그리 급헌가?"
"워따 이 사람아 자네는 대장부 사나이라
마음이 넉넉하여 그러지마는
나는 밤이나 낮이나 기다리고 바래던 우리 사위
예전 얼굴이 그대로 있는가 어서 좀 보세"
향단이 촛불을 가져오니
춘향 어모 받쳐 들고 어사또를 자세히 살펴보니
걸인 (乞人) 중에도 대방 걸인이 되었거늘
춘향모 간담 (肝膽)이 서늘하여
어사또를 물끄럼히 바라 보더니
들었던 촛불을 내 던지고
"잘 되었구나 잘 되었네 열녀 춘향 신세가 잘 되었네
책방에서 글 읽을 때는
낮이나 밤이나 보고 보고 또 보아도
귀골 (貴骨)로만 생겼기에 믿고 믿고 믿었더니
믿었던 일이 모두가 허사로구나
설마 설마 허였더니 설마가 사람을 죽이네 그려
이 서방 이 사람아 무엇하러 내 집에 왔나
보기싫네 나가소 이 사람아
이 사람아 사람을 여럿을 상 (傷)헐 사람"
이때여 모친이 광기증 (狂氣症)이 새로 나서
후문으로 우루루루루루 들어 가더니
칠성단 (七星壇) 부어논 물동이를
눈 위에 번쩍 들어서 쾅 쾅 쾅 부딛치며
"아이고 하나님!
백발 휘날린 머리 물 마를 날이 전혀 없이
밤낮 주야 빌었더니 적도 대방 걸인이 되었으니
내 정성이 부족하여 저 지경이 되었는가
하나님이 노천 (老天)이 되어
영험 (靈驗)이 없어서 이러는가
이제는 잘 되라고 빌어 볼데도 없게되니
죽었구나 죽었구나 내 딸 춘향이는 죽었구나"
떴다 덜컥 주저앉으며 가슴을 쾅 쾅 두다리고
머리도 찍걱 부딛치며
여광여치 (如狂如癡) 실성발광 (失性發狂)
남지서지 (南之西之)를 가르킨다
어사또는 시치미를 뚝 떼고
우는 춘향모만 더 답답하게 꾸미고 앉아 있겄다
"장모 날로 봐서 그만 참소 참어"
"흥, 미운년이 똥 싸고 우줄거린다더니
자네를 보고 참으라고?"
"그 장모가 말허니 말이지 내 얼굴 많이 변했지?
춘향에게 장가 올때만 하더라도 얼굴 좋았지
얼굴 뿐 아니라 형세로 말 허더라도
서울서 둘째 가라면 섧게 알던 행세인데
아 그 돈이 나발 소리 들은 돈이라 그런지
나가기로 드니 허망허게 나가 버리데 그려
별 수 있나 집안이 망허고 보니
내 꼴도 이렇게 되데 그려 헐 수 있나
아버님께서는 일가댁 사랑에 가 학장질 허시고
어머님은 외가로 가시고
나는 친구 사랑으로 이리 저리 돌아 다니다가
풍편 (風便)에 듣자허니
춘향이가 본관 (本官) 수청을 들어 잘 되었다기에
돈 백냥이나 얻어 쓸까 허고 불원천리 왔더니
춘향 신세는 나 보다 더 불쌍허게 되었으니
내 일이 낭팰세"
춘향 모친이 울화증 나는대로 해서는
당장 때려 내쫓을 일이로되
그럴 수는 없고 살살 말로 따서 쫓을 작정이었다
"이 서방 , 말을 들으니 가이없네마는
내 신세를 생각허면 기맥히오
어느 자식이 있나 춘향 하나를 믿고 사는디
춘향이가 저렇게 죽게 되었으니
난들 무슨 재미로 세간 두고 살겄소
이 집도 벌써 다 팔아 먹고
춘향 미음 양식 거리도 없으니
이 서방은 구관 사또 자제라
저녁은 물론 잡쉈을 것이고
우선 주무실래야 주무실데가 없을테니
저 널널헌 객사동 (客舍棟) 대청에 가 주무시오"
향단이 듣다 여짜오되
"여보 마나님 그리 마오 쌀 한줌이면 밥을 짓고
나무 한뭇이면 불 때지요
서방님 괄세하셨단 말 아기씨가 들으시면
옥중 자결을 할 것이니 서방님 너무 괄세마오"
만단 (萬端)으로 위로허고 밖으로 나가더니
기둥안고 돌아 서서 옥 있는 곳 바라보며
치마자락 끌어다 눈물 흔적 씻치면서
"아이고 애기씨~
무삼 죄가 지중 (至重)하여 이 지경이 웬 일이요
서방님 정대 (正大)하신 처분,
아기씨의 착한 마음 어찌 복을 못 받는고
하나님도 무심허여 살펴주실 줄을 모르신고"
측은한 울음 소리 어사또 목이 메어
"우지 마라 우지를 말어라
이 얘 향단아 우지를 마라
충비 (忠婢)로다 충비로구나
우리 향단이가 충비로다"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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